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리 브룩하이머 (문단 편집) == 생애 및 경력 ==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의 자녀로 1943년 [[디트로이트]]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영화보다는 사진에 흥미를 보였었다. 이후 [[애리조나 대학교]]에 진학해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이후 처음 일한 곳은 광고회사. 나름 CF를 기막히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훗날 CF감독으로 이름났던 마이클 베이를 키워주게 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광고 상도 타는등 인기를 끌었으나 그의 관심은 이미 영화로 옮겨져 있었다. 1972년 폴헬믹 제작자와 딕 리처드 감독과 함께 '''컬페퍼 캐틀 컴퍼니'''를 시작으로 영화 업계에 뛰어들어 조금씩 명성을 쌓아갔다. 이때만하더라도 아직 메인 제작자의 보조로서 역량을 닦는 수준이었는데, 워낙 감각이 있다보니 조금씩 소문이 퍼져나갔다. 1980년에 [[리처드 기어]]를 주연으로 아메리칸 지골로를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커리어상 최초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였고, 이를 계기로 할리우드에 브룩하이머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며 본격적으로 유명 제작자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제작자 인생 최초의 빅히트 흥행작이라고 할만한 [[플래시댄스]]를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영원한 파트너가 될 뻔했던 돈 심슨과 최초로 공동 제작한 작품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약 9천만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는데 1983년이라는 시기를 생각해보면 굉장한 성취였다. 돈 심슨이 사망하기 전까지 그와 계속해서 공동 제작을 해 나갔으며 이후의 작품들이 모두 큰 흥행을 거두었다. [[에디 머피]]를 당대의 영화배우로 올려준 [[비버리 힐스 캅]] 시리즈나, [[톰 크루즈]]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탑건(영화)|탑건]], 당대 국민 배우들 중 두 명인 [[덴젤 워싱턴]]·[[진 핵크먼]]과 협동한 [[크림슨 타이드]], [[윌 스미스]]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려준 [[나쁜 녀석들(영화)|나쁜 녀석들]] 등등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흥행하였다. 돈 심슨과 브룩하이머의 합은 매우 좋았는데 스튜디오(영화 제작사)에서 바닥부터 시작해 일을 배워오며 커리어를 쌓아온 심슨은 인간관계를 맺고 사람을 쓰는데 능했고 돈을 끌어오기 위해 경영진들과 협상하는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반면 브룩하이머는 영화 현장을 몸소 뛰며 감독, 배우와 얘기를 나누었으며, 감독의 아주 고유한 부분은 내버려 두면서도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을 자기 스타일 대로 이끌며 흥행작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망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영화 제작 과정에도 굉장한 영향력을 끼쳤다. 좋게 말하면 바른 길로 잡아주는 것이지만 감독들에게는 그냥 짜증나는 고역 그 자체인 인물. 토니 스콧이나 직접 발굴한 마이클 베이를 제외하면 시리즈를 빼놓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감독은 거의 없다.--베이도 어느정도 크고 나서는 바로 도망쳤지--] 바깥일과 안살림을 나눠서 잘하다보니 당연히 지속적인 흥행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둘의 관계는 [[더 록(영화)|더 록]]을 마지막으로 끝나게된다.[* 심슨은 심각한 마약 중독때문에 일을 태만히 하는 면이 있었고, 브룩하이머는 이에 강경책으로 맞섰으나 안타깝게도 [[더 록(영화)|더 록]]을 촬영하는 도중 돈 심슨이 약물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더 록의 엔딩 크레딧에 돈 심슨에게 바친다는 헌정 문구가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더 록'은 평가와 흥행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이후 홀로서기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받았다. 돈 심슨의 특출난 대인 관계 및 협상 능력때문에 제리 브룩하이머는 그간 영화 제작 자체에만 힘을 쏟을 수 있었으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더욱 승승장구했다.1997년 흥행작 [[콘 에어]]를 시작으로 독립한 브룩하이머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끈 [[아마겟돈(영화)|아마겟돈]], [[리멤버 타이탄]], [[코요테 어글리]], [[식스티 세컨즈]] 등을 통하여 준대박이상의 흥행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며 2000년대 중반까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1년엔 예상과 다르게 [[진주만(영화)|진주만]]이 초대박을 치지 못하고 준대박을 기록했다. 같은 해에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또다른 영화인 [[블랙 호크 다운]]도 초대박 흥행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얻으며 작품성을 챙겼다.[* 브룩하이머의 작품 중에서 평론가들에게 작품성으로 인정받는 작품은 몇 개 되지 않는데, 그래도 아주 대놓고 흥행만 노린 작품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02년에 야심차게 만든 배드컴퍼니도 재미를 못 보면서 흥행력이 조금 주춤하다는 평가를 받으려고 하던 즈음, 2003년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시작하며 다시 한번 저력을 과시했고 2004년 [[내셔널 트레져 시리즈]]도 성공해서 자신의 흥행력에 달린 물음표를 완전히 떼버렸다. 영화 제작 이외에도 1998년부터 티비 시리즈를 제작했다. 2000년엔 총괄 제작자로서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CSI 시리즈]]를 만드는데 이 시리즈가 배심원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쳐 미국 법조계에까지 영향이 미칠 정도로 인기를 끌자 스핀오프인 [[CSI 마이애미]]나 [[CSI 뉴욕]]등으로 확장시켜갔다. CSI시리즈는 무려 16년이나 지속되어 2016년 [[CSI : Cyber|CSI 사이버]]를 끝으로 그 대장정을 마쳤다.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 TV 시리즈들을 런칭하였는데 사실 [[콜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재미 본 것이 없었다. 영화들과 CSI가 승승장구하던 2000년대 중반이 지나가고 후반부터 슬슬 그의 흥행력에 다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7년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를 마지막으로 2010년까지 별다른 흥행작이 없었고 그나마 성공한 작품은 시리즈의 힘에 기댄 2011년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뿐이었다.[* 작품성은 물론 재미에 있어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해당 영화가 오리지널 영화였다면 분명히 망했겠지만 프랜차이즈의 명성 덕에 10억 달러가 넘는 큰 흥행을 거두었다.]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근 20년간 할리우드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지만 2010년대에 와선 TV에서도 영화에서도 힘을 못쓰고 있다. 2016년을 기준으로 70살이 넘은 나이를 생각해보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2000년대 이후에는 디즈니와 협업해왔지만 2014년부터 다시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계약을 맺어 34년만에 나온 [[탑건(영화)|탑건]]의 후속작인 [[탑건: 매버릭]]과 [[이안(영화 감독)|이안]] 감독의 SF 스릴러 영화 [[제미니 맨]] 제작에 참여했다. 2020년 1월에는 17년 만에 돌아온 [[나쁜 녀석들(영화)|나쁜 녀석들]] 시리즈의 최신작 [[나쁜 녀석들: 포에버]] 를 제작했는데 '''시리즈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오랜만에 재기에 성공했다. 2021년엔 [[CSI 라스베가스]] 시즌 16(베가스) 제작에 참여했다. 2022년엔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에 참여한 [[탑건: 매버릭]]이 흥행과 평을 모두 잡아 대성공을 거뒀다. 6월 톰 크루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팬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날 따라 무더운 날씨 속에서 몇 시간씩 야외 행사가 이어졌는데도 한국 나이 80에도 거뜬히 건강한 모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